이승룡 시인의 ‘시(詩)를 멈추다’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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이승룡 시인의 ‘시(詩)를 멈추다’
  • 이승룡
  • 승인 2024.03.18 09:11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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내 누이들

하기야 뭐 그땐 그랬지 모두 다 힘든 시절이었으니까 
어무니 홀로 계신 고향 집에서 오랜만에 재회한 큰누이, 안방에 걸린 아부지 사진에 먼지를 닦아내며 응어리로 남아 있던 어린 시절 기억들을 더듬고 있다

뭘 그리 꾸물거리냐는 아부지 호통에 누이들 새벽녘 일어나 두어 시간 밭일 돕고 나서 등교 시간 늦었다며 씻는 둥 마는 둥 하고 울며불며 학교로 뛰어가던 날들

비가 온다는 라디오 일기예보에 비상이 걸려 우리 누이들 늦은 밤까지 밭에 나가 별을 보며 감저 빼떼기를 줍고 있을 때, 난 공부한답시고 책상머리에 앉아 책을 뒤적거리던 날은 또 몇 번이던가

군(軍) 출신이던 아부지는 참 완고하기도 하셨지 
기상 시간 새벽 다섯 시, 통금시간은 저녁 아홉 시 
어쩌다 한번 귀가 시간 조금이라도 늦는 날엔 가차 없이 아부지는 부지깽이로 매를 들었었지

식사할 때마저도 어무니와 누이들은 부엌에 모여앉아 양푼째로 꽁보리밥을, 아부지와 나는 방 안에서 쌀밥을 섞어 따로 먹었던 일 일들 
누이들, 나 기억하오 또렷이 기억하오

지금은 모든 애증의 세월 넋두리 속에 녹이며 외려 술을 좋아하던 아부지 안주 더 챙겨 드리지 못해 일찍 돌아가셨다고 못내 아쉬워하는 큰누이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리고 있는 것이다

그 시절 다 그랬고 모두 힘든 때였지만 내 누이들 고생 많았지 참으로 고생 많았지 학교도 제대로 못 다니고 취업전선에 뛰어든 누이들 눈물겨운 희생 덕에 나 여기까지 왔소

누이들, 미안하오 그리고 참으로 고맙소 
잊지 않으리다 나 잊지 않고 살리다


*감저 빼떼기: 날 고구마를 납작하게 썰어 말린 것(주로 소주 주정으로 사용됨)

 

시인 이승룡

·제주 출생
·제주대학교 행정학과 졸업
·건국대학교 행정학 석사
·2018년 계간 <서울문학> 시 부문 ‘신인상’으로 등단
·前 수협중앙회 준법감시실장
·前 (주)수협유통 대표이사
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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